막막함

from Note 2010/03/21 21:13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사놓고 내내 읽지 못하다
몇 시간 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중간에 끊지 않을 수 없었다. 밥 먹은 지 꽤 지났는데 목에서부터 명치 아래까지 뭐가 걸려서 안내려가는 것처럼 답답해서다.
아, 갑갑해. 갑갑해.
난 넋두리밖에 못하니까 더 그렇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
저걸 다 품고 있던 김용철 변호사는 속이 까맣게 탔을 거다. 양심고백을 하기 전까지 온갖 병에 시달리고, 하루종일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는데 정말 그럴만한 무게다.

얼마 전
지인이 이병철 탄생 100주년 기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기업 오너 인맥 지도를 만든 이야길 해줬다. 삼성-중앙일보-동아일보-신세계-CJ-삼양 등등이 어떻게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네이버 인물 검색만으로 알았다며 엄청 흥미로운 영화 이야길 하듯 들려줬었다. 그 쪽으론 전혀 관심도 없고, 정보도 없던 난 "그래? 그렇게 연결되는구나" 끄덕이며 들었는데..그 이야길 해준 지인의 표정에서 느껴졌던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동경의 기운이 잊혀지질 않는다.

생각해보면
큰 일을 하려면 조그만 잘못 쯤은 덮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우리나라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서로 공범을 만드는 문화가 정말 강하게 뿌리 내리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잘못의 규모를 조그만 것에서 큰 것으로 점점 키우는 그런 문화. 내가 지인의 이야기에서 얼핏 느꼈던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동경 속에도 그런 마음이 어느 정도 들어있었던 것 같다. '아휴, 된다면 당연히 그렇게 살고 싶지. 누가 마다하겠어. 그들만의 리그를 지키기 위해 통용되는 룰? 그런 것 정도는 덮을 수 있지. 그것 때문에 내가 직접 피해받는 일도 없잖아?' 뭐, 이런 마인드랄까? 어딘가에 고용된 노동자이자 보통 서민이 재벌가의 삶과 그들이 가진 것에 관대함을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이 가진 부의 일부(어쩌면 대부분일수도)는 내 가족, 친척, 친구가 야근하고 스스로를 들들 볶아가며 이뤄낸 것 덕분인데. 그리고 내가 그들이 만든 물건을 소비했기 때문인데.

취업 기사를 쓸 때, 삼성계열 입사자 이야길 꼭 넣어줘야 독자 아이들이 만족해하고
삼성 제품은 나부터도 살 때 믿음이 간다.
워낙 삼성계열사의 폭이 넓다보니 알고 보면 가족이나 친구 중엔 삼성계열사 직원이나 관계사 직원이 꼭 끼어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부터도 그 일원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잘못을 나눠진 것 같은 불편함이 느껴진다.)
적립식 펀드라는 시스템이 생기고 나서는 아마 삼성계열사에 투자 안하는 월급쟁이를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전 국민이 관계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고
전 국민이 사랑하는 브랜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어찌보면 감동적인 일이다.
그렇게 주인이 많은데
그런데 왜 '삼성=이건희 일가의 것'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지게 놔두었을까.
그리고 하나의 가설일 뿐인 그 등식이 시대를 초월해서 언제나 증명되는 진리가 되도록 놔두었을까.
내가, 그리고 내 친구들이 그럴려고 열심히 일했던 건 아닌데. 그럴려고 삼성 제품을 믿고 산 건 아닌데.
개별적인 존재 하나하나, 그 많은 사람들을 무능화시킨 '그들만의 리그'를 생각하면 화도 나지 않는다. 온 몸에 힘이 쫙 빠진다. 그리고 막막하다.



2010/03/21 21:13 2010/03/2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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