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책, 영화, 음악을 읽고 보고 듣고 싶어진다.
그것들이 전해주는 '힌트'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이렇겠구나, 하는.
그렇게 어깨너머로 상대방의 취향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어느새 그 책, 영화,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뭐랄까, 짜릿하다.
두 세계의 원이 아주 천천히 조금씩 움직여서 작게 포개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릴 때 교집합, 여집합 등을 배울 때 보았던 산수 책 속 두 개의 원 그래프처럼.
그러나 그런 '우주적 이벤트'는 자주 벌어지지 않았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와 그 음악. 조선일보 시절 이동진 기자의 시네마 레터. 비틀즈. 우디 앨런. 에드워드 호퍼.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
물론 그렇게 어렵고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라서 '우주적 이벤트'인 것이지만.

2주 전에는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산도르 마라이라는 헝가리 작가의 책을 읽게 된 것도 사람 때문이었다.
서늘할 정도로 예리하고 아름다운 구절이 몇군데 있어서 앞에서 말한 그런 기적을 기대했지만, 결론적으론 일어날 듯 일어날 듯 일어나지 않았다.
산도르 마라이의 <결혼의 변화>라는 소설을, 내가 좋아하는 박완서 할머니가 "펼쳐들자마자 첫 장부터 빨려들고 말았다"라고 평했다는데..그걸 읽어볼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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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 불멸의 신적인 것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방 안에 혼자 있으면 코를 후빈다. 내 영혼 안에는 인도의 온갖 지혜가 자리하고 있지만, 한번은 카페에서 술 취한 돈 많은 사업가와 주먹질하며 싸웠다. 나는 몇 시간씩 물을 응시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뒤좇을 수 있지만, 어느 주간 신문에 내 책에 대한 파렴치한 논평이 실렸을 때는 자살을 생각했다. 세상만사를 이해하고 슬기롭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때는 공자의 형제지만, 신문에 오른 참석 인사의 명단에 내 이름이 빠져 있으면 울분을 참지 못한다. 나는 숲가에 서서 가을 단풍에 감탄하면서도 자연에 의혹의 눈으로 꼭 조건을 붙인다. 이성의 보다 고귀한 힘을 믿으면서도 공허한 잡담을 늘어놓는 아둔한 모임에 휩쓸려 내 인생의 저녁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리고 사랑을 믿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인들과 함께 지낸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인 탓에 하늘을 믿고 땅을 믿는다. 아멘."

"구월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이 깨지기 쉬운 형상, 세상을 유리로 감싼 듯 모든 것이 가슴 저리게 밝고 온아하다.
지금 구월의 유리 진열장 속에서, 세상이 진정 대가의 걸작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까칠한 잎새들이 제멋대로 늘어진 나무들은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외롭게 빈방을 지키는 술 취한 남자들 같고, 왠지 짜증스럽게 꽃이 만발한 정원은 상여 같다. - 유리"

"아직까지 생명의 탄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삶의 어떤 것, 특정한 것, 학교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 생명의 탄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역학에 대한 안목이 없으며, 생명을 창조하는 신비하고 무서운 공장을 알 수 없다. 생명이 탄생될 때 가동되는 힘, 삶과 죽음의 힘. 그 시간에 어머니와 아이는 맹목적인 본응으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더듬거린다 -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 순간에 힘이 솟구치면서, 마치 지진처럼 어머니의 몸을 밀고 폭파시킨다. 피와 태반 대신 뜨거운 마그마와 화산재가 자궁에서 흘러나와도 보는 사람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공장을 보았다. 숙연, 아주 숙연해진다. 잠시 후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고 증인들이 슬며시 방 안을 떠나면, 미켈란젤로가 돌팔이고 뉴턴이 풋내기였다는 느낌이 든다. - 공장, 역학"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기계적으로 그냥 따라 말하지 말고, 이제는 굳게 믿어야 한다. 어느 날 운명이 너를 손으로 건드리리라. 네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른 시각에 다른 의도로. 삶이 너에게 손을 대면, 너의 일상은 불가사의한 일들로 가득 차리라. - 손길"

"자연이 감기에 걸린 듯 대기가 오한에 시달린다. 나무들이 콧물을 흘리고, 젖은 수건으로 감싸듯 안개가 밤의 초원을 덮고 있다. 국화가 예민한 아이들처럼 재채기를 하고, 보리수나무 꽃차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세상이 열과 오한에 시달린다. 아침저녁으로 일 그램의 아스피린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오한"

"'눈이 내린다' 이 두 낱말은 더없이 비밀스러운 기본적인 삶의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너는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그만 놓치고 말았어"라고 이야기하거나 "조국,조국,조국"이라고 세 번 되풀이하여 말하는 듯 하다. 아니면 "기억이 나는가?"라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감정에는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분석할 수도 없다. - 눈이 내린다"

"새벽 네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 도시가 폭격을 맞았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든 것이 물속에 잠긴 듯, 저녁에 기이한 적막이 도시를 뒤덮었다. 폭격기들도 침묵했다.
저녁 무렵 도시에는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교외의 집 몇 채와 불가사의하게도 폭격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종탑만이 온전했다. 시내 중심가의 유서 깊은 아름다운 옛집들과 대성당은 파괴되었는데, 종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종지기는 저녁마다 그랬듯이 138개의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 청동으로 주조한 종을 쳤다. 종소리가 시내 곳곳에 울려 퍼졌다.
종지기는 자신이 맡은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행동이 전혀 의미가 없다. 상징도 아니다. 도시가 멸망하면 상징들도 그 의미를 잃는 법이다. 그러나 종소리는 울려 퍼졌고, 폐허 위를 맴돌았다. 부상당한 자와 죽음을 앞둔 자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평상시에 모든 것이 공허하고 무상했으며, 도시의 유일한 의미는 벽이 무너져도 침묵하지 않는 그 소리였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물론 종지기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종지기에게는 월말에 돈을 받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래서 걱정을 하며 이를 악물고 종을 친 것이다. 그러나 새카맣게 그을린 돌 틈 사이에서 종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진 탓에, 도시는 폐허 속에서도 살아있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 종을 울리자. - 도시"

"언젠가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엄한 판사가 물을 것이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고통과 실망, 절망 뿐이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오. 당신은 행복한 적도 있었소. 자주는 아니지만 분명 행복한 순간이 있었소. 그 순간을 말해보시오."
뭐라 답변할 것인가? 나는 고개를 떨구고 귀 뒤를 긁으며 당황하여 앞을 응시할 것이다. 그리고 내 대답.
     "맞습니다. 저도 행복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행복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맛이 아직도 혀에 생생하고, 그 향기가 코끝에 스치고, 그 긴장이 신경을 타고 흐릅니다. 그런데 그게 언제였지요? 어린 시절? ......아닙니다. 그다지 즐거운 어린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청소년기 아니면 나이 들어서? 음울한 기억들이 더 강하게 모든 것을 뒤덮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과연 언제 행복했지요? ......이제 알았습니다. 기억조차 할 수 없는 평범한 순간이었습니다. - 행복"

"네가 사귀었거나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인생을 추리 소설에서처럼 묘사하라. 그러면 별안간 모두들 수상쩍은 용의자가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조급하게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려들고, 의심스러운 물건이 사방에 널려 있으며, 하찮은 것들이 은밀한 의심의 빛을 받아 특이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용의자들"

"문학은 솔직하지 못하게 시건방을 떨며 돈을 경멸한다. 돈이란 막이 오르기 전에 무대 감독이 주인공에게 건네주는 연극의 소도구이고, 무대에서만 사용되며 성대한 공연에서 시시한 역할만을 하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적어도 사랑이나 죽음에의 공포, 야망이나 조국애만큼 삶을 채우는 돈은 실제로 훨씬 더 미묘한 체험을 가져다준다. 돈과 관련된 일상적인 체험, 즉 이십 펭고의 특별 지출이나 오십 펭고의 특별 수입이 우리 삶에서 빚어내는 극적인 긴장감을 ,사랑이나 야심보다 한층 더 복잡 미묘한 이 감정의 응축을 묘사한 글은 아직까지 없었다. 돈이란 원래 그런 감정의 응축이며, 살다보면 사소하고 평범한 돈에서도 그런 감정의 응축을 자주 볼 수 있다. 팔 펭고 오십의 충격, 이십육 펭고의 행복, 십칠 펭고의 절망을 묘사한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문학은 대부분 극단적인 것, 존재하지 않거나 터무니없이 많은 돈에 대해서만 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터무니없는 많은 것 사이에서 살고 계산하고 느끼고 열광하고 눈물을 흘린다. - 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수그러들거나 사라질 줄 모르고 말로 형용할 수도 없는 이 흥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 나를 덮쳐서 시험하는 이 중압감과 불안 - 아침이고 저녁이고 글을 쓰기 전의 망설임, 거듭되는 준비와 마음의 각오, 게으름, 담배, 독서, 그리고 혹시 마지막 순간에라도 방해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남모르는 은밀한 기대, 게다가 실제로 방해하는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아무리 훈련을 하고 경험을 쌓아도 나아지지 않는 가슴 두근거림! 그러다가 정말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말이 무르익어서 신호가 되고 확정된 표현이 되려 한다. - 시작하기 전에"

"칠월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넘치게 무르익었다. 냉장고 안에서 우유가 응고하고 살구가 상하고 고기가 부패했다. 감정들이 시큼하게 변질되고 사회 구조가 조각나 떨어져나가고 국제 협정이 해체되었다. 보리수나무에 새싹이 돋는가 하면 장미가 시들었다. 사방 천지에서 파멸, 악운이 시큼하게 발효하며 부풀어올랐다. 들판에 널려 있는 시체들은 멍한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플랑드르에서는 어느 외로운 농부가 밀짚모자를 쓰고 폭격 맞아 부서진 탱크 사이에서 밀을 베었다. 사랑은 단 하룻밤 불타오르고 시들었다. 칠월, 파멸의 달이었다고 기억한다. -파멸"


2010/04/22 12:33 2010/04/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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