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가 뭔진 모르겠는데
심통이 난다. 오늘이 원고 쓰기 시작해야 하는 5일이란 것도, 벌써 밤 10시란 것도, 서은영 실장이 난데없이 무례하게 군 것도, 남친이 나보다 바쁜 것도, 뭔가 끼적여야만 사라질 건더기가 내 마음 속에 철푸덕 자릴 잡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심통난다. 이 모든 게.
혼자 속으로 지랄을 시작했다.
오전에 만난 정현선배는 소닉 유스 로고가 그려진 파란 티셔츠를 입고, 얼마 전 오픈한 자신의 카페 '워시'에서 나보다 딱 1과1/2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외국의 코인 런드리에 가보면 빨래 기다리면서 음료 꺼내먹고 그러잖아요. 그 컨셉으로 꾸며보고 싶었어요"라며 가게 곳곳에 발현된 자신의 취향을 전도하셨다. 선배 설명대로 가게는 선배를 꼭 닮아 유니크했고, 재치있었다. 주스를 먹고 싶으면 냉장고에서 알아서 꺼내먹어야 하고, 커피도 에스프레소 머신 작동법을 교육받아 직접 내려 먹어야 하는 가게. "이 주스를 고르면 내가 이렇게 쿠키를 함께 세팅해요" "이 후추는 타이항공 기내식에 나오는 건데 가져왔어요. 이 핫핑크가 딱 내 컬러거든." "나, 요즘 웃는 거 말고 멍하게 있는 사진에 꽂혔잖아. 그렇게 찍어줘요." 등등 신나 죽겠는 말투로 촬영을 리드하셨다. 에이에이뮤지엄에서 구입한 1950년대 네덜랜드 빈티지 체어, 얼룩말 모양의 에스프레소 잔, 여행 중 팔빠지게 들고 오셨다는 크리스찬 라끄르와 리미티드 에비앙 등등 선배의 취향을 대변하는 아이템들에 둘러쌓여, 선배는 진실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나라면, 저런 물건들 때문에 저렇게까지 행복을 느낄까?라고 잠시 생각해봤다. 대답은 '노'였다.
오후에 만난 김애경 편집장은 스트레스 때문에 간 주위에 염증이 생겨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특집 기사를 위해 톱스타들을 섭외하면서 동시에 목포를 오가며 방송을 하고, 전달에 쓴 인터뷰 기사 때문에 이승철에게 쌍욕을 들어먹다 쓰러져 실려간 적도 있다고 했다. 내 머리통에 생긴 5백원짜리 크기의 원형탈모는 그나마 낫네,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약간 이상한 방식의 대화였다. "나 이 정도로 스스로를 못살게 굴었었잖아, 그런데 그렇게 안하면 성에 안 차." 이런 게 자랑이 되는 대화. 물론 치열함이 흉이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스스로를 응급실로 처넣을만큼 치열할 수 있었던 건 일에 대해 그것보다 더 큰 열정과 애정이 있었다는 거니까. 그녀는 그 말을 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신의 치열했던 시간에 대해 일말의 후회없이, 전적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나라면, 행복을 느꼈을까?라고 잠시 생각해봤다. '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스'라고 답할 확신도 없었다.
그 두 분은 나보다 대여섯살이나 많으시고, 잡지판에서 알아주는 열정가들이고, 훌륭한 선배들이지만 그녀들을 닮고 싶어 안달이 나진 않았다. 그런데 저녁먹고 원고 쓰려고 앉아 투닥거리다 보니 괜시리 심통이 난다. 이런 모습도 아니고, 저런 모습도 아닌데..그렇다고 '나는 이 길을 가련다!'란 확고한 방향을 잡은 것도 아니니 갑갑증이 도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괜히 날짜 탓을 하고, 서은영 실장 탓을 하고, 남친 탓을 한다.
흠.. 이게 너의 '글'이구만..
마치 그 때의 장면을 니식대로 편집한 다음, 2배 빠르게 돌려보는 느낌이야 ㅋ
좀 수다스러웠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