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취미

from Note 2012/01/2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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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대전 부모님댁에 내려왔다가 경이로운 것을 발견했다.
2010년 8월 5일부터 시작된 아빠의 새로운 취미.
아니, 취미라기보다는 아빠의 시간, 일분일초를 조각해놓은 핸드 크래프트 작품.

요즘 우리 아빠는 성경책의 모든 구절을 손으로 적어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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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20대 시절 원불교도였고 청년회장까지 맡으셨던 이력이 있다.
직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잠깐 활동한 것이었지만 하는 동안엔 꽤 열심이었고, 리더십도 있었노라고 하셨다.  
원불교도일 때도 세상을 더 알려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끝까지 2번 통독을 하셨다고 했다.
그 이야길 내가 중학생 때 즈음 해주셨는데
당시 깨작깨작 교회에 다니던 나는
믿음 때문도 아니고
호기심 하나만으로 다른 종교의 교리를, 나는 지루해 죽을 것 같은 그 두꺼운 책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뻥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는 하기로 했으면 어기지 않고 계속 해내는 류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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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 때
아빠는 신문의 사설, 칼럼, 하루한자 섹션을 스크랩해서 2장씩 복사한 다음 일정 분량이 모이면 책으로 묶어서 나 한권, 언니 한권 선물해주셨다. (그때 우리에겐 그게 선물이 아니라 부담이어서 받아만 놓고 공부하진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3년 정도 그 일을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 뿐만 아니라
신문의 건강 기사만 모아서 <건강하게 삽시다>라는 이름을 단 스크랩 단행본을 셀프 제작하시고
어느 수지침 전문가의 연재기사에 꽂히신 다음엔
신문 스크랩을 너머 독학으로 수지침의 세계를 섭렵해버리셨다.
신문을 보고 버리는 게 아니라
생선 살을 발라내듯 필요한 콘텐트만 발라내 묶고 엮었다.
그 흔적의 일부가 아빠 방 책꽂이에 이렇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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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빠에게 '에디터 본능'이 있었다'
오늘, 이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읽을거리에 대한 원인모를 수집욕구, 본능같은 끌림, 자기만의 숙성법이 아빠에게도 있는지 몰랐다.
매일 신문을 오리고 붙이고 엮는 아빠를 보고 자랐으면서 몰랐다.
이 뒤늦은 깨달음이 가슴을 쿡쿡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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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손으로 옮기기>라는 아빠의 새로운 취미 흔적을 발견하고 난 뒤, 이래저래 오가는 감정들이 많다.
코끝에 안경을 걸치고 침침한 눈으로 문장 하나하나를 써내려가고 있는 풍경이 어른어른 눈 앞에 그려진다.
무엇이 아빠로 하여금 저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걸까 생각하면
마음이 일렁일렁한다.
'아빠가 글에 대한 에너지와 집념을 발산할 더 좋은 환경을 만났었다면..'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애잔한 마음은 곧 존경으로 바뀌었다.
일상의 권태를 이기는 독특하고 의미있는 시도, 무뎌지고도 남을 나이인데도 아빠만의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 '해보자' 했던 것을 '해냈다'로 만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마음과 엄격함.
...65세가 되었을 때, 나도 저런 몰입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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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나보다 한 3천5백배쯤 위대한 사람인 것 같다. 여러모로.  




2012/01/23 22:20 2012/01/2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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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dream 2012/01/30 13:1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와우. 아버지가 대단하시구나...

    •  address  modify / delete 2012/02/01 16:18 radioheadian

      그러니깐요. 아빠의 끈기 DNA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산만한 아이가 나왔는지 저도 의아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