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번 집에 이사오면서 많은 것을 버렸는데, 카테고리 자체를 삭제한 품목이 있다. 요리에 필요한 양념류들이다. 사소한 거 뭐라도 하나 만들어 먹으려면 간장, 국시장국, 다시다, 고춧가루, 소금, 맛소금 등등 종류는 종류대로 갖추어야 하는데 정작 몇번 쓸 일이 없어서 매번 유통기한이 지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않기로 선택했었다.
그래놓으니
이따금 내가 끓인 만두국에 밥을 먹고 싶은 날에도 간장, 소금, 파, 계란이 없어서 끓여 먹지 못하고 무언가를 시켜먹는 일이 발생했다. 기본 양념을 갖춰놓으면 될 일이었지만
내가 언제 또 해먹겠나, 어차피 다 버리게 될 거다 싶어 그냥 넘기고 넘겼었다.
그리고 나를 주방일(이렇게 부르기도 민망한 초보적인 생명유지 행위)로부터 도망치게 한 또 다른 이유는 음식물 쓰레기였다.
어릴 때부터 비위가 무척 약해서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 비닐을 바꾸려고 풀석거리시는 걸 곁에서 목격이라도 하면 "우엑~" 헛구역질이 반사적으로 나왔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었다.
집에서 음식을 해먹으면 당연히 나오는 음식물쓰레기. 그걸 들고 내려가 언제 비웠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음식물쓰레기 분리수거통의 뚜껑을 열고 진동하는 쓰레기 썩는 냄새를 참아가며 그 안에 부어 넣는 행위는 나에겐 '무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음식물쓰레기를 아예 만들지 않으려고 했었다.
바나나 껍질, 차를 끓이고 남은 옥수수알이나 박하 입사귀, 치킨을 먹고 남은 뼈 정도가 우리집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의 전부였다. 그런 것들은 비닐봉지에 넣어 꽉 묶은 다음 일반쓰레기 봉투 안에 넣어 함께 버렸다. 내 머릿속에서 '그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나온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야'란 생각이 있었고, 그게 분명 핑계로 작용하게 내버려두었고, 분리수거를 하지 않았다는 자책에 시달릴만한 양의 음식물쓰레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환경보호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어쨌든 이러했는데
대전에서 올라온 친구가 집밥을 먹게 해주겠다며
이런저런 양념류와 대파(우리집에 대파가 들어온 건 거의 1년만이다!), 숙주(숙주는 처음이다!), 김치, 두부, 콩나물 등등을 사와 요리를 해줬다.
맛나게 저녁을 먹고
남은 대파와 숙주는 썰어서 냉동실에 넣었고
두부와 콩나물, 햄은 언제 먹게 될지(반대로 언제 버리게 될지) 살짝 불안했지만 어쨌든 냉장고에 넣었다.
오늘 오후에 친구가 돌아갔다.
나는 집에서 쉬는 오늘이라도 해먹지 않으면 죄다 버리게 될 거란 생각에 콩나물국을 끓여서 저녁을 먹기로 선택했다.
과연 내가?라는 의구심으로 시작한 콩나물국 끓이기는 매우 흡족하게 마무리됐다.
냉장고에 있던 콩나물도 맛있게 다 먹었고, 식당밥으로 내 위장들을 괴롭히지도 않았으며, 돈도 아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문제 한가지, 음식물쓰레기 비우기.
친구가 저녁 만들어줄 때 나온 쓰레기랑 내가 오늘 떼어낸 콩나물 대가리들이 모여 있으니 양이 꽤 많았다.
식사다운 식사를 한 후에 나온 음식물쓰레기였고,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기엔 나를 불편하게 할만큼의 양이었기 때문에 분리수거통으로 들고 내려갔다.
오피스텔 이사 와서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음식물쓰레기통.
10발짝 이내로 나가가자 예상대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쩌나, 해야지 싶어서 뚜껑을 열고 털어넣기 시작했는데..응? 의외로 심각하지 않네? 그리고 센스있는 경비 할아버지가 쓰레기통 뚜껑에 손을 대고 열지 않도록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공중 손잡이'를 만들어두어서 손을 더럽힐까봐 전전긍긍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변화는 내가 헛구역질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음...
음식물쓰레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토록 구구절절 정리하는 건
오늘 사건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이다.
어린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쌓아둔 '나는 이런 애야'라는 생각들이 이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단 걸 확인했다고 해야하나?
내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주저하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겁을 내거나, 싫어했던 일들.
시간이 지나
나란 사람이 변했으면
그 생각들도 한번쯤 점검해보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내가 손해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난 무척 기뻤다.
내가 두려워하고 겁내고 반사적으로 싫어할 것이 하나 줄었으니까.
조금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의 선택.
앞으로 음식물 쓰레기 나오는 게 싫어서 밥을 사먹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리고 오늘의 발견.
환경에 대한 나의 의식은 먹고 남은 치킨 뼈다귀 수준이란 것.
==================
30분 전쯤 여기까지 쓰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문득 '뼈는 음식물쓰레기가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로 써놓은 게 있으니 확인은 해야겠다 싶어서 검색해봤더니, 세상에 세상에!
바나나 껍질, 차찌꺼기, 뼈 이 세가지 중에 음식물 쓰레기는 바나나 껍질 뿐이란다.
역시 사람은 알고 말해야 돼.
오늘의 발견 추가
그동안 일반쓰레기 봉투에 버렸던 것들 중에 음식물쓰레기가 아닌 게 대부분이었다니 안심이지만, 그렇다고 환경에 대한 의식이 있다고 말은 못하겠음.
또 한가지 덧붙이기.
나는 확실히 말에 예민함.
이번 집에 이사오면서 많은 것을 버렸는데, 카테고리 자체를 삭제한 품목이 있다. 요리에 필요한 양념류들이다. 사소한 거 뭐라도 하나 만들어 먹으려면 간장, 국시장국, 다시다, 고춧가루, 소금, 맛소금 등등 종류는 종류대로 갖추어야 하는데 정작 몇번 쓸 일이 없어서 매번 유통기한이 지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않기로 선택했었다.
그래놓으니
이따금 내가 끓인 만두국에 밥을 먹고 싶은 날에도 간장, 소금, 파, 계란이 없어서 끓여 먹지 못하고 무언가를 시켜먹는 일이 발생했다. 기본 양념을 갖춰놓으면 될 일이었지만
내가 언제 또 해먹겠나, 어차피 다 버리게 될 거다 싶어 그냥 넘기고 넘겼었다.
그리고 나를 주방일(이렇게 부르기도 민망한 초보적인 생명유지 행위)로부터 도망치게 한 또 다른 이유는 음식물 쓰레기였다.
어릴 때부터 비위가 무척 약해서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 비닐을 바꾸려고 풀석거리시는 걸 곁에서 목격이라도 하면 "우엑~" 헛구역질이 반사적으로 나왔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었다.
집에서 음식을 해먹으면 당연히 나오는 음식물쓰레기. 그걸 들고 내려가 언제 비웠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음식물쓰레기 분리수거통의 뚜껑을 열고 진동하는 쓰레기 썩는 냄새를 참아가며 그 안에 부어 넣는 행위는 나에겐 '무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음식물쓰레기를 아예 만들지 않으려고 했었다.
바나나 껍질, 차를 끓이고 남은 옥수수알이나 박하 입사귀, 치킨을 먹고 남은 뼈 정도가 우리집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의 전부였다. 그런 것들은 비닐봉지에 넣어 꽉 묶은 다음 일반쓰레기 봉투 안에 넣어 함께 버렸다. 내 머릿속에서 '그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나온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야'란 생각이 있었고, 그게 분명 핑계로 작용하게 내버려두었고, 분리수거를 하지 않았다는 자책에 시달릴만한 양의 음식물쓰레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환경보호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어쨌든 이러했는데
대전에서 올라온 친구가 집밥을 먹게 해주겠다며
이런저런 양념류와 대파(우리집에 대파가 들어온 건 거의 1년만이다!), 숙주(숙주는 처음이다!), 김치, 두부, 콩나물 등등을 사와 요리를 해줬다.
맛나게 저녁을 먹고
남은 대파와 숙주는 썰어서 냉동실에 넣었고
두부와 콩나물, 햄은 언제 먹게 될지(반대로 언제 버리게 될지) 살짝 불안했지만 어쨌든 냉장고에 넣었다.
오늘 오후에 친구가 돌아갔다.
나는 집에서 쉬는 오늘이라도 해먹지 않으면 죄다 버리게 될 거란 생각에 콩나물국을 끓여서 저녁을 먹기로 선택했다.
과연 내가?라는 의구심으로 시작한 콩나물국 끓이기는 매우 흡족하게 마무리됐다.
냉장고에 있던 콩나물도 맛있게 다 먹었고, 식당밥으로 내 위장들을 괴롭히지도 않았으며, 돈도 아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문제 한가지, 음식물쓰레기 비우기.
친구가 저녁 만들어줄 때 나온 쓰레기랑 내가 오늘 떼어낸 콩나물 대가리들이 모여 있으니 양이 꽤 많았다.
식사다운 식사를 한 후에 나온 음식물쓰레기였고,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기엔 나를 불편하게 할만큼의 양이었기 때문에 분리수거통으로 들고 내려갔다.
오피스텔 이사 와서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음식물쓰레기통.
10발짝 이내로 나가가자 예상대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쩌나, 해야지 싶어서 뚜껑을 열고 털어넣기 시작했는데..응? 의외로 심각하지 않네? 그리고 센스있는 경비 할아버지가 쓰레기통 뚜껑에 손을 대고 열지 않도록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공중 손잡이'를 만들어두어서 손을 더럽힐까봐 전전긍긍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변화는 내가 헛구역질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음...
음식물쓰레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토록 구구절절 정리하는 건
오늘 사건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이다.
어린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쌓아둔 '나는 이런 애야'라는 생각들이 이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단 걸 확인했다고 해야하나?
내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주저하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겁을 내거나, 싫어했던 일들.
시간이 지나
나란 사람이 변했으면
그 생각들도 한번쯤 점검해보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내가 손해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난 무척 기뻤다.
내가 두려워하고 겁내고 반사적으로 싫어할 것이 하나 줄었으니까.
조금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의 선택.
앞으로 음식물 쓰레기 나오는 게 싫어서 밥을 사먹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리고 오늘의 발견.
환경에 대한 나의 의식은 먹고 남은 치킨 뼈다귀 수준이란 것.
==================
30분 전쯤 여기까지 쓰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문득 '뼈는 음식물쓰레기가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로 써놓은 게 있으니 확인은 해야겠다 싶어서 검색해봤더니, 세상에 세상에!
바나나 껍질, 차찌꺼기, 뼈 이 세가지 중에 음식물 쓰레기는 바나나 껍질 뿐이란다.
역시 사람은 알고 말해야 돼.
오늘의 발견 추가
그동안 일반쓰레기 봉투에 버렸던 것들 중에 음식물쓰레기가 아닌 게 대부분이었다니 안심이지만, 그렇다고 환경에 대한 의식이 있다고 말은 못하겠음.
또 한가지 덧붙이기.
나는 확실히 말에 예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