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대지 마시오, <박쥐>

from Note 2009/05/06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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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그 자체.
 

















나이들수록 달달한 음식이 싫어지는데
영화 보는 취향도 입맛과 많이 비슷해지는 것 같다. <박쥐>를 보고 나니 설탕 코팅이 빤닥빤닥, 오색깔로 되어 있는 복고풍의 눈깔사탕(아마 세트나 의상 같은 프로덕션 디자인 탓이겠지..)을 먹은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거라 맛은 나쁘지 않은데, 먹고 나니 입안이 텁텁한 느낌이랄까.
 
<올드보이><친절한 금자씨> 정도의 재미는 있을 줄 알았는데, 중후반에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영화 마지막까지 팔딱팔딱 거리며 눈길을 끄는 건 옥빈양 뿐이었다. 그 옛적 1-2페이지짜리 신인 인터뷰 때 늘상 보던 옥빈양이 이렇게 달라 보이다니..똑똑하지 않아도 저런 연기가 나올 수 있구나, 완전 감탄했다. <박쥐>를 찍느라 패션지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던 지난 1년, 잡지판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종종 하곤 했었다. "김옥빈이 이번에 모든 걸 걸었다. 하긴..걸 때가 오긴 했다. 이번에도 못 치고 올라가면 고만고만한 애로 남을 거다." 오오오, 그런데 멋지게 치고 올라왔다. 장하다, 옥빈. 태주가 처음 피를 맛보고 혀를 낼름거리는 장면에서 정말 소름이 끼쳤다. 후반부에 태주가 어떤 식으로 폭발할지, 그 장면에서 이미 예감할 정도였으니까.

반면 송강호가 맡은 상현은 좀 짜증났다. 날씬해진 송강호를 보는 건 좋았으나, 그리고 몇몇 장면에선 서늘해질 정도로 연기가 훌륭했지만, '상현'이란 신부님이 짜증나는 성격이시라..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장 귀에 거슬렸던 건
"나 착한 일 하러 간 거 아시죠?"다.
두세번 정도 반복되는 이 대사는 상현이 얼마나 유아적인지 느껴보라고 박찬욱 감독이 특별히 힘주어 쓴 대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경에 거슬렸다.
비슷한 대사는 또 있었다.
신하균을 죽인 다음 옥빈양에게
"살인만큼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를 살리기 위해 했다"라고 말하던 장면도 그렇고
자살을 원하는 사람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준 뒤 (그들을 직접 죽였는지, 죽은 다음 피를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피를 얻어와서는
"사람들이 그래도 내 덕분에 마음 편히 세상을 뜨는 것 같아."라고 말했던 장면 등에서..

정리해 말하면 상현은 "그건 불가항력이다!"라고 말할 여지가 늘 있다.  
그의 입장에선 억울하기도 할 거다.
뱀파이어 피를 선택해 수혈받은 것도 아니고, 색기 줄줄 흐르는 태주가 남편한테 학대당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 강우를 죽인 거고, 피를 먹지 않으면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나마 자살하는 사람들만 골라 피를 마셨으니 "그래도 난 착하잖아!"라고 말하고도 싶겠지.
근데 매사에 그렇게 핑계대는 남자, 좀 짜증나지 않나?
게다가 상현이 태주에게 했던 대사("뱀파이어가 안되고 그냥 신부였으면 내가 너랑 잤을 거 같아?")를 보면 그의 그 '불가항력 이론'이 핑계로 쓰인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 '난 뱀파이어가 되어서 너랑 자는 거야. 그냥 신부가 아니길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말하는 속말이 들리는데, 다른 장면에선 "내가 착한 일 하러 아프리카 간 거 잖아요. 내가 그 피를 선택한 건 아니잖아요"라고 그것 때문에 정말 깊이 고뇌하는 것처럼 말하시니..어익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보도자료에는 분명
신부 상현이 육체적인 욕망과 신앙심 사이에서 고뇌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뱀파이어가 되어서 내심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니, 보는 나도 당혹스러웠다.
상현이 자신의 사타구니를 매로 내려치는 장면이 두번 나오긴 했는데 (아마 여기서 '고뇌'를 느껴보라고 넣은 장면인 것 같다)
태주의 유혹 앞에선 '아아, 이러시면 안되는데...' 정도의 작은 발버둥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옳다쿠나, 하고 넙죽 잘 순 없으니까 몇번 빼보는, 형식적인 절차랄까.
한마디로 상현이 고뇌하는 장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거다. 그나마 송강호가 눈빛으로 많이 보여준 편이고.

개인적으로 상현이라는 캐릭터에게서 에너지가 느껴지는 장면은 딱 세 장면이 있었다.
첫번째는 야밤에 뜀박질하는 태주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 므흣한 에너지도 흐르고, 음악이 아름답기도 하고, 딱 여자들이 좋아할 행동이었다. 집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진짜 이유는 (내가 보기엔)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스스로 내린 첫번째 선택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두번째는 강우를 죽인 다음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노신부를 찾는 장면.
노신부를 죽이고 심장의 피를 마시는 선택 역시 상현이 스스로 내린 선택이었다.
그 씬 안에서야 손톱이 문드러져 빠질만큼 이브바이러스가 퍼져있어서 빨리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상현이 죽게 생겼으니까 마신 걸로 보이는데.. 그 전까지는 뇌사 환자 피로 잘 연명했으면서 왜 그 지경으로 바이러스가 퍼질 때까지 피를 마시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뱀파이어의 피를 얻어 앞을 보고 싶어했던 노신부에게 "뱀파이어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그걸 직접 느껴보게 하고 싶어서였을까? 죽이지 않아도 노신부는 상현에게 자신의 피를 잘 내어주었는데, 왜 굳이 죽여야 했을까? 이런 의문이 계속 없어지지 않았다.
추측해보자면
1. 강우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노신부를 없애기 위해
2. 신앙의 아버지였던 노신부가 땅바닥을 기면서 "니 피 좀 나눠 다오"라고 말했던 것에 환멸을 느끼고, 신앙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결심 차원에서
이 두 가지 생각이 드는데
정황상 아무래도 2번이 답에 가깝지 않을런지...

세번째 에너지가 느껴졌던 장면은 상현이 자신을 부활한 신부로 추종하는 광신도 집단의 여신도를 강간한 장면이다. 자신에게 돌 던지는 신도들을 뒤로 하고 상현이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난 여기서 상현이 '니들이 믿는 거 순 뻥이야. 정신차리고 현실(현실의 나)을 봐.'라고 말했다는 생각을 했다. 광신도들의 믿음을 산산히 깨부수는 것, 그게 상현이 스스로 내린 세 번째 선택이다.

난 이 세가지 말고 다른 행동에선 그가 스스로 한 선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다 불가항력이었다. 강우를 죽인 건 태주의 거짓말에 속아서, 태주를 죽였던 건 태주가 죽여달라고 해서(강우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면서 질투하게 만들었고), 태주를 뱀파이어로 다시 살린 건 사랑하니까, 태주와 어긋나기 시작한 건 강우를 죽였다는 죄책감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없어지지 않아서, 사람 사냥하는 뱀파이어 태주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건 태주가 이브바이러스까지 걸려버렸으니까, 마지막 태주를 속이고 동반자살을 결심한 건 태주가 지랄해서 강우엄마(김해숙)가 진실을 알아버렸고, 사람도 여럿 죽었고, 그냥 있다간 태주가 컨트롤이 안 될 것 같아서..

물론 스토리의 힘이라는 게 저런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과연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서 나오는 것이란 건 안다. 근데 <박쥐>에선 지나치게 주인공이 상황에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주인공의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앞서 말한 세 장면에서 그나마 상현이란 캐릭터가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넓게 보면 벗어날 수 없는 흙탕물 속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주도적으로 선택이란 걸 해서.

또 하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뱀파이어를 보여주마!'라고 야심차게 뱀파이어계의 송강호스러운(여기서 '송강호스럽다'란 형용사는 '인간적이고 소시민적이다'라는 의미다.) 캐릭터를 만들어 낸 의도가 읽혔다. 일면 신선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과 미장센, 조연은 미쳐있는데, 주인공만 송강호스러우니까 아귀가 안맞는 듯한 느낌도 당연히 들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링겔을 입에 물고 피를 쪽쪽 빠는 장면은
살인은 하지 않으려는 상현의, 상황 앞에선 무기력하지만 그 안에선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긴 장면이었겠지만
나와 함께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모두 빵,터졌다는..
설마 웃기는 게 그 장면의 목적은 아니겠지? 내가 의도를 잘못 파악한 건가? ;;;

영화를 보고 드문드문 떠올랐던 잡생각들을 글자로 거의 옮겨놓은 지금..
박찬욱 감독에게 진짜진짜 묻고 싶은 게 있다.
"근데 왜 이브바이러스는 백인과 아시아인 남자들만 걸리나요?"
그는 왜 굳이 백인과 아시아인 남자들만 걸리는 병을 만들어냈을까? 거기서 흑인 남자도 걸린다고 말하면 영화 스토리에 큰 영향이 있나?
요거요거 파보면 재밌는 게 나올 거 같은데..

아, 그리고 죽은 강우가 '죄책감'을 시각화해 등장하는 중반부의 여러 장면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있다.
영화 속 공간이 애당초 국적도 섞이고, 현실감이라곤 전혀 없는 공간이긴 했지만
상현과 태주가 죄책감을 느끼며 변해가는 그 장면까지도 그렇게 비현실적인 연출을 했어야 했을까? 그것도 참 의도가 궁금하다.
난 그 장면들을 볼 때 좀 얄미웠는데..
누군가 사과할 때, "야, 어제 너한테 그 말하고 정말 일분일초도 마음 편히 못 있었고, 한숨도 못 잤고, 어떻게 말할지 고민했고 어쩌고저쩌고" 떠벌떠벌 거리면 진심이 안 느껴지잖나. 그런 맥락에서 왜 그 장면도 좀 희화화 되지 않았나, 싶은데..

날 밝으면 박찬욱 감독 인터뷰 한 기사 없나 찾아봐야겠다.

2009/05/06 01:37 2009/05/06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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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ang2 2009/05/08 16:5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요건 볼 거니까 영화보고 읽어봐야지

    •  address  modify / delete 2009/05/08 23:21 radioheadian

      그래그래. 영화 보기 전에 읽으면 절대 안돼, 이건. 아마 영화값 물어내란 소리 하고 싶어 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