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머지 자초지종은 신문 사회면에서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속물적인 칼럼에서 읽었다. 나는 그런 기사를 자주 읽지는 않는 편이지만, 혐오할 만한 일이 다 떨어졌을 때 읽곤 한다."

"진짜 재미란 것은 없지만 부자들은 그걸 모르지. 재미있는 일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으니까. 부자들은 남의 아내 빼고는 절실히 갖고 싶어하는 것도 없지만 그런 욕망도 배관공의 아내가 거실에 달 새 커튼을 갖고 싶어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미약하기 그지없다네."

"나는 저녁 영업을 하려고 막 문을 연 바가 좋아. 안의 공기는 아직 시원하고 깨끗하며 모든 것이 반짝거리고, 바텐더는 막 거울에 자기 모습을 마지막으로 비춰보며 넥타이가 똑바로 됐나 머리가 단정한가 점검하고 나오는 참이지. 바의 뒤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병도 좋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유리잔이나 기대감도 좋아. 바텐더가 그날 저녁의 첫 잔을 만들어 빳빳한 받침 위에 내려놓고 작게 접은 냅킨을 옆에 놓아두는 모습도 좋지. 술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좋아. 조용한 바에서 조용하게 그날 저녁의 첫 잔을 마신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야."

"격조 높은 흥분을 자아내긴 하지만 불순한 감정이지. 미학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거야. 나는 섹스를 비웃는 것은 아니네. 필수적이기도 하고, 추하게 볼 필요도 없는 것이지. 그렇지만 항상 잘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섹스를 매혹적인 대상으로 유지하기란 십억 달러짜리 산업에서 일 센트까지 맞아떨어지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의 평범한 얼굴은 오랫동안 고된 일을 하고도 제대로 된 보답을 받지 못해 주름이 진 듯싶었다. 그게 바로 경찰의 문제점이다. 경찰을 철저하게 싫어하려고만 하면 그 순간 인간적으로 대하는 경찰을 만나게 된다."

"그해 강력계장은 그레고리우스 경감이었는데, 점점 희귀해지고는 있느나 아직 멸종되지는 않은 종류의 경찰로, 눈이 부실 정도의 불빛을 비추거나 고무 곤봉으로 갈기고 신장 부위를 걷어차며 사타구니를 무릎으로 차거나 명치에 주먹을 먹이고 척추 끝을 야경봉으로 치는 수법으로 범죄를 해결하려는 사람이었다."

"집어치우시지, 그렌츠. 술이나 마시고 인간답게 행동하라고. 당신이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은 기꺼이 알아줄 수 있어. 그렇지만, 시작하기 전에 쓸데없는 힘은 좀 빼라고. 당신이 충분히 강하다면 그런 건 필요없을 거요. 그리고 그런 게 필요하다면 당신이 나를 괴롭혀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거요."

"그러고는 엉덩이를 살짝 흔들며 하얀 작은 테이블로 걸어가, 흰 운동복 바지를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남자 옆에 가서 앉았다. 피부를 어찌나 골고루 태웠는지 수영장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이 확실해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여자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여자는 비상용 소화 양동이처럼 입을 활짝 벌리고 웃었다. 그 모습에 그 여자에 대한 내 관심이 싹 사라져 버렸다. 웃음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입을 벌리자 얼굴에 난 구멍만 봐도 충분했다."

"그들은 젊고, 피부는 그을렸으며, 정열적이고 활력에 가득 차 있었다. 전화 거는 데만도 내가 뚱뚱한 남자를 네 계단 정도 들어올리는 데 쓸 만한 근력을 쓰고 있었다."

"어떤 지점을 넘어서면 모든 위험은 다 똑같아진다고 한 건 누가 한 말이었죠?
월터 배젓인 것 같군요. 고층건물 수리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요."

"집에 돌아와서는 TV를 켜고 권투 경기를 보았다. 별볼일 없는 경기로, 아서 머리 밑에서 무용 강사로 일하는 편이 나았을 선수들뿐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잽과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작과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서로 페인트하는 게 다였다. 그중 어떤 선수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머니를 깨울 만큼도 세게 때리지 못했다."

"그는 이전에 내게도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했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만큼 궁한 적은 없었다. 개자식이 되는 방법으로는 백하고도 아흔 가지가 있는데, ..."

"다시 말해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의사들이 그득한 건물이었다. 별로 능숙하지도 않고, 별로 깨끗하지도 않으며, 별로 기민하지도 않고, 간호사에게는 고작 3달러와 공손한 말 정도밖에 주지 못하는 사람들. 현재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종류의 환자를 받을 수 있는지, 돈을 얼마나 짜내서 유지비를 낼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지치고 맥을 잃은 의사들. 신용카드는 받지 않아요.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십니다. 의사 선생님이 나가십니다. 어금니가 상당히 많이 흔들리네요, 카진스키 부인. 새 아크릴 충전재를 하시는 게 어때요. 금니나 다름없답니다. 그럼 십사 달러에 해드릴게요. 이 달러 더 내시면 노보카인도 드리고요.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십니다. 의사 선생님이 나가십니다. 삼 달러 되겠습니다. 지불은 간호사에게 해주세요."

"나는 질겅질겅 씹힌 실오라기 같은 기분으로 차를 돌려 할리우드로 돌아왔다."

"불에 탄 나무판에 얹어 내오는 햄버거로, 노릇노릇하게 구운 매시드포테이토, 튀긴 어니언링, 집에서 부인이 해줬으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겠지만 식당에서는 군말 없이 먹어치우는 혼합 샐러드를 곁들인 음식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전날 밤 받은 넉넉한 수임료 덕분에 늦게 일어났다. 나는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더 피운 뒤 캐나다산 베이컨을 한 조각 더 먹고 나서는 다시는 전기 면도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300번째 다짐했다."

"빅터의 바는 너무나 조용해서 문 안에 들어설 때 기온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었다."

"전화를 끊자 나는 체스판을 꺼냈다. 나는 파이프를 채우고 체스말들을 사열하여, 프랑스식으로 면도했는지, 단추가 헐렁해진 데는 없는지 검사하고 나서 고르차코프와 메닌킨의 챔피언 결정전을 복귀해보았다. 72수 만에 끝나는 경기로, 꿈쩍하지 않는 상대를 만난 무적의 군대, 갑옷 없는 전투, 무혈의 전쟁의 훌륭한 견본이었으며, 광고회사를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인간 지성 낭비의 정수였다."

"달은 보름달에서 나흘 정도 지나 약간 이지러졌고 벽에 어린 달빛의 네모난 조각이 장님의 커다란 우윳빛 눈처럼, 벽의 눈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다. 농담이다. 이 바보같은 직유법이라니. 작가들이란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다른 무언가를 닮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내 머리는 휘저은 크림처럼 뭉클하지만, 그렇게 달콤하지는 않다. 또 직유법을 써버렸군. 이런 저질의 작업들을 생각하면 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글러먹은 녀석, 웨이드. 형용사를 세 개나 쓰다니, 작가로서도 글러먹었어. 제기랄, 형용사를 세 개씩 쓰지 않으면 의식의 흐름조차도 묘사하지 못하는 거야?"

"모든 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아침이었다. 나는 진이 빠졌고, 지쳤으며, 몸이 둔했다. 시간은 수명이 다 된 로켓처럼 부드럽게 윙윙대며 일 분  일 초씩 흘러가 공허 속으로 떨어졌다. 바깥 관목숲 속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고, 차들은 끊임없이 로렐캐년 위아래로 지나갔다. 보통은 그런 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시무룩했고 심통이 났고 지나치게 민감했다. 나는 숙취를 완전히 없애버리기로 했다."

"그녀는 지치고 초조해 보였다. 이 바보 같은 건축물 덩어리가 그녀를 우울하게 하는 것 같았다. 이 집이라면 잘 웃는 멍청이도 우울해질 것이고, 킥킥거리다가도 구슬프게 한탄하는 비둘기로 변할 것이다."

"내 마음 다른 구석에서는 여기서 나가서 이 일에서 손 떼라고 하고 있었지만, 이쪽은 절대 따르지 못할 부분이었다. 내가 일찌감치 그렇게 했다면, 나는 고향에서 계속 살면서 철공소에서 일하고, 주인집 딸하고 결혼해서 애를 다섯 낳아 일요일 아침에 애들에게 웃기는 신문이나 읽어주고, 애들이 버릇없이 굴면 머리를 찰싹 때려주기도 하면서, 애들에게 용돈을 얼마 줘야 할지, 애들이 라디오나 TV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봐야 할지와 같은 일로 아내와 승강이를 벌이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을 유지가 되어, 방이 여덟 개나 있는 집에서 살고, 차고에는 차 두 대를 넣어놓고, 매주 일요일마다 닭고기 요리를 먹고, 거실 탁자 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놓여 있으며, 인두로 머리카락을 지진 아내와 함께 머리가 시멘트 자루처럼 굳어버린 채로 살고 있겠지."

"저 멀리서 밴시의 울음 같은 경찰차나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높아졌다 사라졌으니 완전히 긴 적막 속으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 외로움이나 복수심, 공포 때문에 절망적이 되고 분노하기도 하고 잔인해지기도 하며 열에 들뜨고 몸을 흔들며 흐느끼기도 한다. 다른 도시보다 더 나쁠 것도 없는 도시, 부유하고 활기차고 자부심으로 가득 찬 도시, 잃어버리고 얻어맞고 공허함으로 가득찬 도시.
모든 것이 다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지, 개인이 따놓은 점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달려 있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나는 술을 다 마셔버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검시관은 부인이 마치 한 켤레의 벨벳 장갑이라도 되는 양 살살 다뤘다."

"그리고 입을 열자 나온 목소리는 마치 시간을 알려주는 전화기에서 나오는 기계 목소리처럼 명료하고 공허했다."

"커피는 너무 우려냈고 샌드위치는 낡은 셔츠에서 찢어낸 조각처럼 냄새가 너무 진했다. 미국 사람들은 빵을 구워서 이쑤시개 두 개로 꽂아놓고 옆으로 양상치가 비어져나오게 만든 것이면 무엇이든 먹는다. 그것도 시든 양상치면 더 좋고."


==================================================================

내 인생의 중요한 스승님 중 한명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나의 영웅이었다"라고 했다기에, 그리고 하루키가 워낙 챈들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나도 챈들러의 소설을 분명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선님(<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의 김동영 작가)'이 말해주어서 알게 된 <기나긴 이별>.

650페이지나 되는 두께는, 긴 호흡으로 독서하는 습관이 전혀 없는 나로선, 원망스러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다행인 건 추리소설이라 책장 넘기는 속도가 다른 소설의 2배 정도는 빨랐다는 사실.
생선의 말대로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해변의 카프카> 같은 소설의 냄새가 몇몇 장면, 그리고 사물의 묘사 방식에서 느껴졌다. 그런데 주인공 '필립 말로'의 캐릭터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내 머릿 속에선 하루키 소설과는 전혀 다른 인상으로 남을 것 같다.

앞으로 누군가 "필립 말로..."라며 이야기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면
난 피식 웃음부터 지을 것 같다.
이 남자, 너무 재밌다.
정의로워야 한다는 생각이 온전히 백퍼센트로 그를 사로잡고 있어서 그게 유아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될대로 되라지'식의 태도라 매사에 긴장하는 법도 없고, 속으로 온갖 것들을 씹어대며, 혼자서 계속 중얼중얼. 한번 생각을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는 모습이 자꾸 웃게 만든다. 살인사건을 다루는 작품답게 전반적인 분위기는 근엄하고 비장한 면이 있는데, 필립 말로는 왜 그렇게 귀여운 면이 있는지..  날카로운 추리력에 놀라며 멋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우디앨런의 발작적 수다를 볼 때 느꼈던 코믹함과 친근함을 느끼는 일이 오히려 많았다.

확실히 재밌는 소설이고
챈들러의 묘사력은 정말 끝내준다.

2009/05/10 22:52 2009/05/10 22:52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