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3주가 지났는데도 생각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흙길 위에서 털털털털, 부르르부르르, 먼지를 내면서 온 몸으로 시동을 걸려고 노력하는 트럭이 된 심정으로
겨우겨우 요즘 본 것들에 대해 기록한다.
어쩌면 요즘 본 것들이 너무 덩치 큰 이야기들이라 '막힘' 현상들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생각이 술술 풀려나오길 기대하기 참으로 어려운 주제들이니까. 어쨌든.
# 홍형숙 <경계도시><경계도시2>
퇴원하자마자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무슨 영화들을 하는지 보려고 블로그에 구경을 갔었다.
다가오는 토요일에 홍형숙 감독이 대전에 내려와 감독과의 대화를 한다는 공지가 올라와 있었고, 기대치도 않았던 행운 덕에 이 영화들과 감독의 생각들을 만났다.
1편을 DAUM에서 다운로드해서 보고 극장에 갔는데, 1편보다는 2편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1편은 송두율 교수 본인에 집중했고, 2편은 송두율 교수라는 존재를 다루는 주변의 방식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변의 방식이 결국은 우리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 마음의 발을 뺄 수가 없다. 7년 전 있었던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래서 결국 나를) 들춰내는 영화다.
영화가 끝나고 1시간 가량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정말 많은 이야길 들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감독이 "내 안에는 당연히 없으리라 여겼던 레드콤플렉스가 실제로는 있었다. 그게 강력하게 작용해서 작품의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당시엔 그저 버티고 기록하자는 심정이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스스로 몸 담고 있는 곳의 흐름에서 자신만은 예외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나도 자주 하는 생각인데, 그게 굉장히 허약한 착각이라는 걸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다.
나만 정신 차리고 있으면 된다, 나만 아니면 된다,라고 생각해도 자각이 닿지 않는 틈새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칫솔질 할 때 칫솔모가 잘 닿지 않는 틈새를 닦으려면 조금 더 공들이고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자각이 닿지 않는 틈새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들여다볼 때 조금 더 공들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가지 깨달음.
감독과의 대화를 듣고 나면 그 작품에 대해 뭐라 한마디 쓰기가 참으로 어려워진다는 것. 구석구석 말끔하게 설명을 들으면 내 해석이 자라날 여지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관객에게 좋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 물론 홍형숙 감독의 이야기 자체는 완전 좋았다. 감독의 이야기가 좋았냐 나빴냐의 차원이 아니라, 영화를 텍스트 삼아 생각을 펼치고픈 욕구가 있는 관객에겐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이 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 김규항 <예수전> 
나오자마자 사두었었는데, 읽긴 이제야 읽었다. 기대했던대로 재미있고 의미 깊은 책.
마르코복음(마가복음)에 기록된 인간 예수의 행적과 당시 시대상에 비춰볼 때 그 행동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해주는데, 완전 흥미진진했다. 나를 '한국 교회'에서 멀어지게 했던 거북한 면모들이 예수의 뜻과도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일종의 통쾌함 같은 것도 느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얼마나 예수의 뜻에 동참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특히 바리새이인들에 대한 설명에서 그랬다.
흔히 바리새이인을 위선적이고 못된 '공공의 적'의 대명사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이스라엘 인민들에겐 존경을 받았던 계층이 바리새이인이라고 한다.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는 것처럼 보이는 엘리트층이라 인민들은 그들을 따르고 그들의 삶에 존경을 표했지만, 바리새이인들은 근본적으로는 그 지배체제가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더 나아가 원하지 않았던 것. 지배체제 하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문제점들에 대해서만 비난하는 것은 멀리 보면 그 지배체제가 무너지는 원인을 사전에 제거해주기 때문에 그 체제를 더 공고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 원리를 통찰할 줄 알았던 예수는 그래서 유독 바리새이인들을 그토록 '갈구었다'는 것.
이 지배체제에 자본주의를 대입해보면, 말로는 자본주의의 해악을 설파해서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서 식견있다는 평을 듣지만 실은 자본주의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믿지 않고 상상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리새이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난 책의 이 지점에서 완전 찔렸다. 어머, 나 바리새이인이었던 거야? 이러면서 뜨끔뜨끔.
자본주의를 고도화시키는 데 상당히 일조하는 업계에서 일한다는 불편감(이전에도 살포시 느끼고 있던)이 또 다시 머리를 들이밀고 올라왔지만, 용기없음으로 주저주저하고 있다.
# 신재식, 김윤성, 장대익 <종교전쟁>
이 책도 읽을려고 사놓았던 건데 회사 다닐 때는 어마어마한 두께(600페이지 정도)에 엄두도 못내다가 이제야 읽었다. 사실 이번 휴가동안 했던 일 중 가장 보람찬 일 Best 3안에 들만한 사건. 내가 이렇게 두꺼운 책(소설도 아닌데!)을 결국 다 읽다니! 이렇게 감격할만큼 평소에 책을 끈기있게 못 읽는다는 얘기지만..어쨌든. ㅎㅎ
이건 뭐, 인상적이었던 것을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책이라서 뭐 어떻게 정리정돈도 할 수가 없다.
다만 이 책이 내게 준 선물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도 있다는 사실이 준 안도감 같은 게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창조론을 믿어야 하는 것 같은 풍토가 장악하고 있지만, 그건 내키지가 않았었다. 성경이 과학 논문도 아닌데 자꾸 거기서 무슨 증거를 찾으려 하고 뭐라도 하나 나타나면 "봐봐. 우리 말이 맞잖아"라며 고것만 파고드는 창조과학이 가진 태도가 싫었다.
그리고 반대로 실질적 증거가 없으면 그것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고 믿는 과학주의도 내키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삶을, 그리고 정신까지도 한 차원의 이론으로 '일괄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유물론도 이상하게 느껴졌고. 정말 <이기적인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을 쓴 도킨슨의 말처럼 이기적인 유전자니, 밈이니 하는 것들이 전부일까? 그것들이 설명해주는 것이 분명 있겠지만, 그 이론들이 정말 섬세하고 촘촘한 삶과 생각의 결까지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나?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때 힌트가 된 예시가 있어서, 그리고 이건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옮겨 보자면
"두 분 선생님들께서 승용차가 길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합시다. "왜 저 차가 움직이고 있지?"하고 물어본다고 하죠. "자동차 바퀴가 구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은 하나의 수준에서 좋은 대답입니다. "엔진에서 연료가 연소해서 피스톤과 구동축을 움직이기 때문이다."라는 대답 역시 다른 수준에서 동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좋은 설명입니다. "철호가 운전하고 있기 때문이다"도 여전히 다른 수준에서 있을 수 있는 대답입니다. 또 다른 수준에서는 "철호가 학교에 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언급한 모든 설명은 그 각각의 수준에서 뜻이 잘 통하며, 어떤 설명 하나로 다른 설명을 대치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설명 하나하나는 서로 모순되거나 경쟁하지 않으면서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이중에 어떤 것이 더 나은 설명인지는 맥락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 미리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설명들을 함께 고려할 때, 한 설명만 고려할 때보다 훨씬 더 풍부한 설명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설명의 다원주의는 유물론적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환원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됩니다."
내 설명은 하나의 수준에서 좋은 대답일 뿐이라는 한계를 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구절이다.
# 존 호트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앞에 발췌한 글은 <종교전쟁>의 공동저자인 호남신학대학교의 신재식 교수가 쓴 부분이었고, 그 글은 존 호트라는 신학자의 의견을 옮긴 부분이었다. 과학이 발전하면 그것에 맞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종교성이 드러날 것이고, 과학과 종교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는 입장을 지닌 신재식 교수의 글에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읽게 된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존 호트의 책을 신재식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진화론을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필요 전혀 없다, 신이 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마음대로 하는 독재자여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신에게 투사해 왔는지도 모르는 전제군주의 이미지다, 오히려 기독교의 신은 자기를 낮추고 사랑의 대상이 오롯한 타자로 존재하길 원하는 신이다, 그렇기에 진화론은 오히려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는 고마운 존재다.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
이 책도 완전 재미있었다.
여러가지가 기억에 남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다윈주의와 유물론을 이퀄(=)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지적. 둘이 이퀄이라고 말하는 순간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이 신념으로서의 과학이 되고, 그건 과학 환원주의라는 이야기다. '발생학적 오류'에 대한 언급도 기억에 남는다. 발생학적 오류는 한 가지 현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면 그 현상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비논리적 오류인데, 책에서 사용한 맥락도 인상적이었지만 일상에서 흔히 빠지는 오류라서 기억해둬야겠다 싶었다.
어쨌든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은 긍정하지만, 그게 신념의 차원으로 넘어오는 순간 반대하는 게 존 호트와 신재식 교수의 입장인데, 아직 깊게 생각해본 것은 아니지만 나하고 잘 맞는(혹은 맞을 것 같은) 생각이다.
아참.
존 호트가 말한 '악'의 개념도 흥미롭고, 자극이 됐다.
"진화하는 우주에는 두 가지 형태의 악이 있다. 무질서라는 악이 있는데, 고통 전쟁 기근 죽음이 그 예이다. 그렇지만 또한 단조로움이라는 악도 있다. 단조로움이라는 악은 어떤 사물이 새로워지고 갱신되는 것이 적절할 때, 그것을 거절하면서 평범한 형태의 질서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움과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질서를 혼란시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새롭고 다른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삶의 둘레에 성벽을 쌓는다. 종교과 신학도 역시 질서의 고요에 너무 집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때때로 단조로움이라는 악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혼돈이라는 악을 무릅쓰고서만 가능하다."
--------------------
요즘의 결론은
거시적시각결핍자로 29년을 살다가
왜 갑자기 저런 거창한 생각들을 다루는 책에 꽂혔는지 나도 어안이 벙벙하다는 것.
앞서 말한 '자각이 닿지 않는 틈새'에서 어떤 움직임이나 작용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불가지론자인 생물학자가 쓴 <믿음의 엔진>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뭐, 어안은 벙벙하지만 재미있으니 됐다.
기록 끝.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