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취미

from Note 2012/01/2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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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대전 부모님댁에 내려왔다가 경이로운 것을 발견했다.
2010년 8월 5일부터 시작된 아빠의 새로운 취미.
아니, 취미라기보다는 아빠의 시간, 일분일초를 조각해놓은 핸드 크래프트 작품.

요즘 우리 아빠는 성경책의 모든 구절을 손으로 적어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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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20대 시절 원불교도였고 청년회장까지 맡으셨던 이력이 있다.
직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잠깐 활동한 것이었지만 하는 동안엔 꽤 열심이었고, 리더십도 있었노라고 하셨다.  
원불교도일 때도 세상을 더 알려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끝까지 2번 통독을 하셨다고 했다.
그 이야길 내가 중학생 때 즈음 해주셨는데
당시 깨작깨작 교회에 다니던 나는
믿음 때문도 아니고
호기심 하나만으로 다른 종교의 교리를, 나는 지루해 죽을 것 같은 그 두꺼운 책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뻥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는 하기로 했으면 어기지 않고 계속 해내는 류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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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 때
아빠는 신문의 사설, 칼럼, 하루한자 섹션을 스크랩해서 2장씩 복사한 다음 일정 분량이 모이면 책으로 묶어서 나 한권, 언니 한권 선물해주셨다. (그때 우리에겐 그게 선물이 아니라 부담이어서 받아만 놓고 공부하진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3년 정도 그 일을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 뿐만 아니라
신문의 건강 기사만 모아서 <건강하게 삽시다>라는 이름을 단 스크랩 단행본을 셀프 제작하시고
어느 수지침 전문가의 연재기사에 꽂히신 다음엔
신문 스크랩을 너머 독학으로 수지침의 세계를 섭렵해버리셨다.
신문을 보고 버리는 게 아니라
생선 살을 발라내듯 필요한 콘텐트만 발라내 묶고 엮었다.
그 흔적의 일부가 아빠 방 책꽂이에 이렇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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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빠에게 '에디터 본능'이 있었다'
오늘, 이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읽을거리에 대한 원인모를 수집욕구, 본능같은 끌림, 자기만의 숙성법이 아빠에게도 있는지 몰랐다.
매일 신문을 오리고 붙이고 엮는 아빠를 보고 자랐으면서 몰랐다.
이 뒤늦은 깨달음이 가슴을 쿡쿡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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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손으로 옮기기>라는 아빠의 새로운 취미 흔적을 발견하고 난 뒤, 이래저래 오가는 감정들이 많다.
코끝에 안경을 걸치고 침침한 눈으로 문장 하나하나를 써내려가고 있는 풍경이 어른어른 눈 앞에 그려진다.
무엇이 아빠로 하여금 저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걸까 생각하면
마음이 일렁일렁한다.
'아빠가 글에 대한 에너지와 집념을 발산할 더 좋은 환경을 만났었다면..'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애잔한 마음은 곧 존경으로 바뀌었다.
일상의 권태를 이기는 독특하고 의미있는 시도, 무뎌지고도 남을 나이인데도 아빠만의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 '해보자' 했던 것을 '해냈다'로 만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마음과 엄격함.
...65세가 되었을 때, 나도 저런 몰입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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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나보다 한 3천5백배쯤 위대한 사람인 것 같다. 여러모로.  




2012/01/23 22:20 2012/01/23 22:20




스웨덴에 있는 하이퍼 아일랜드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간만에 '동경'하는 마음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 인터랙티브 미디어 매니지먼트,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인터랙티브 아트 디렉터  등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을 키워내는 학교인데

몇번째 홈페이지를 들락날락 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주아주 심하게 부럽다.



올드미디어의 대왕대비마마를 모시고 8년간 일하다

디지털 미디어 세계에 발꼬락 하나를 들여보니

나의 세상을 보는 방식, 발상법, 생각을 풀어내는 화법, 가치 판단 기준... 이 모든 것에 튜닝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다 뜯어 헤쳐버리고 다시 쌓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참이다.

저기로 날아가면 그게 될 것 같다.


아...저런 식의 토론(보고 말고 토론)하는 회의시간을 가져본 게 언제인지...    

대학졸업 한 뒤론 없는 것 같아. ㅠㅠ



2012/01/21 23:51 2012/01/21 23:51

일상 매매 거래소

from Note 2012/01/18 23:09

얼마 전,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정작 자신은 잊어버린 사소한 족적 하나하나까지 기록되어 보관된다는 점이 찜찜해서 가입을 미루고 미루다가 직접 써봐야 정체를 알겠단 생각에 시작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거슬러 올라가면 옛날 옛적 싸이월드까지, SNS 채널들은 자신의 일상 속 순간, 잠깐의 장면, 그 때의 생각, 감정 한 톨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도록 만든다.

내 마음대로 내 얘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향해 싸지를 수 있는 채널이라서 '자기 표현'이 즐거운 놀이가 되게 만든달까.

한가지 재밌는 건

이전까지는 의례 흘려보내던 사소한 순간까지도

눈에 보이는 것(사진, 트윗, 어느 장소에 방문했다는 팩트...)으로 물성화시켜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내가 소유했다는 기쁨(혹은 착각)을 준다.

SNS 시절 이전까지 내 인생의 타임라인은 어렴풋하게 나만 알고 있었지만, 지금 내 인생의 타임라인은 나보다 페북이나 트위터가 더 잘 알기 때문에 지나간 글이나 트윗을 뒤져봐야 한다.

... 지금 나는 까먹어버린 스물한살 무렵의 고민이, 3년 넘게 로그인 한번 하지 않는 싸이월드 일기장 어디엔가 적혀있다는 게 다행인 걸까, 불편인 걸까.

게다가 그 와중에

'팔리는 내용' '안 팔리는 내용' 가격(댓글, 좋아요, 퍼가기, 리트윗)까지 실시간으로 매겨지니

SNS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넋놓고 보고 있노라면, 때때로 주식거래소 풍경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서 '자기 PR'이라는 단어가 더 듣기 싫어졌다.

일상을 공유하라는 건지, 상품화하라는 건지 모호하게 퉁치는 태도나 발언을 만날 때면

내가 어떤 노선을 취해야 할지 헷갈린다.



2012/01/18 23:09 2012/01/18 23:09





슬라이드 쉐어에서 링크를 걸면 원래 이렇게 저해상으로 바뀌는 건가..
슬라이드 쉐어로 공유하기를 처음 해보는 바람에
비주얼이 참으로 구리게 되어버렸으나
안에 담긴 내용들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내 머릿속 한쪽 귀팅이에서 깔짝깔짝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숙제를 떠넘기는 마음으로
블로그에 포스팅.


2012/01/15 17:57 2012/01/15 17:57

"20세기는 어떻게 보면 출판 매체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산업 논리로만 담아내기 어려운 사회적 열정 혹은 문화적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돈이 열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돈을 만든다. 바로 이것이 문화의 경제적 특징이라면, 잡지는 대표적인 열정 산업이다."

"특정 문화 및 사회 영역에 자체 생태계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잡지가 중심에 서고, 그 주변에 기자와 칼럼니스트 등 소위 '떠드는 사람들'이 포진해야 한다. 실무만 있고 담론이 없으면 그 분야는 활력을 잃는다. 물론 이 열정과 생태계가 고스란히 신매체로 옮겨갈 수만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게 어렵다. 어떻게 보면 20세기 내내 잡지가 형성한 문화생태계를 지금의 형태로 만든 것은 잡지 편집자나 기자가 아니라 설레는 마음으로 잡지를 사 보던 독자들의 정성인지도 모른다. ... 인터넷 매체로 전환할 때, 광고주 뿐 아니라 독자들의 열정과 정성도 따라와줄 것인가?"

"잡지는 독자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을 입문시키고 길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한 분야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공무원이나 학자가 아니라 잡지의 고참 기자인 경우가 많다. '넓고 깊게'는 대학이나 정부가 아니라 잡지에 가장 들어맞는 듯하다. 특정 산업 분야를 생태계로 생각한다면 그 핵심에는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말이 있는 셈이다. 기술이든 생산이든 결국 사람의 일이고, 사람은 말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가. 잡지는 그 말을 모으고 지배한다."

from 우석훈 <문화로 먹고 살기> p19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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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미디어의 조상님
인쇄 매체가의 대왕대비마마
미디어 발전사 안에서 따져보자면 '할멈' 쯤 되는 잡지 콘텐트를 어떻게 '디지타이징(digitizing)' 해야 잡지가 전해주던 재미와 설레임과 매력을 뉴 미디어에서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과감히 팀을 이동한 게 벌써 네 달 전 일이다.

1년 전 쯤, 디지털 매거진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있노라 선언한 <와이어드>와 <타임>의 사례를 보았을 때부터 예감하긴 했었다.

"사람들이 잡지를 왜 보는데?"
"다른 미디어와 차별되는 잡지만의 매력이 뭔데?"

이 질문들에 먼저 대답하지 못하면 내가 찾고 싶었던 답은 얻지 못할 거란 걸.

잡지는 뭘까.
왜 생겼을까.
어쩌다 이런 포맷이 되었을까.
사람들은 잡지의 어느 지점에서 재미를 느낄까.

답도 없는 이런 류의 질문만 스스로에게 해대다가 '아, 몰라몰라. 다 잊고 닥친 마감이나 하자' 했는데
우석훈의 <문화로 먹고살기>에서 귀중한 힌트 한 조각을 얻었다.

역쉬, '셀프 해답'보다는 '취재'가 나한텐 더 익숙한 게지. ㅋ
어쨌든 이걸 계기로
오가다 만난
혹은
일부러 찾아낸 <잡지의 정의>나 <잡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견을 블로그에 모아보기로 했다.

이러다가 덜컥 불로초 한뿌리 캐내길 바라면서.
우리 잡지할멈, 오래 사셔야 하는데..ㅋ


2012/01/03 23:29 2012/01/03 23:29

처방전

from Playground 2011/12/21 22:27

입사 8년이 지난 요즘에서야 간접 목격하고 있는, '본격 조직 생태계 잔혹 느와르'.

편집부에 있을 땐 주말을 반납하고 주7일제로 일편단심 '제작'과 '마감'만 생각하면 되었지만

팀을 옮기고 나선 주5일제 주말이 확보된 대신 '만드는 일' 이외의 것들을 듣게 되고 알아야만 하게 바뀌었다.

회사원이 되기로 작정한 이상 일정부분 알아두고 유념해야 할 점들이지만,
그리고 사내 소식에도 밝아야 한다고 선배들께서 누누이 조언해주셨지만, 혹여나 회사원'만' 되어버릴까봐 두려운 마음이 스물스물 생겨나고 있었던 차였다.

어쨌든 나는, 광고인 줄리안 볼딩(Julian Boulding)이 했다는 말을 살짝 빌려 표현하자면,

"사실 우리는 맨날 똑같은 일만 하는 회계사 같은 건 지겨울 것 같아서 이 길을 선택한 광고인(잡지쟁이)" 니까.  


빈 공간을 찾아내는 눈

계속 하고 싶게 만드는 재미

신선한 삐딱함

순수한 동기

자발적인 몰입
...

이런 이야기나 자극이 필요하던 시점에
알약 하나
툭,
털어넣듯 보고 삼킬만한 동영상을 발견했다.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많이 설레어 하면서 살아야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2011/12/21 22:27 2011/12/21 22:27

"인간의 두뇌는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 꽃 등 자연의 시각적 형태에서 패턴을 인식하듯 정보를 대할 때도 패턴을 인식한다. 스토리는 다름 아닌 이런 인식 가능한 패턴들이다. 또 그 패턴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는다. 스토리를 통해 주변 세상을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한 내용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토리란 잡음 속에서 포착되는 신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몰입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스토리에 참여해 나름대로 역할을 떠맡아 자신만의 스토리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소리쳐 알리려 하기보다 오히려 숨겨놓는다. '관객이 뭔가 발견하면 그걸 공유할 거라 믿었어요. 어쨌든 우리 모두 뭔가 이야깃거리가 필요하니까요'"

" '삶은 지극히 거칠고, 무한하며, 비논리적이고, 갑작스러운 데다 사납다. 반면 예술 작품은 단정하고, 한정적이며, 넘침이 없고, 이성적이며, 여유로운 데다 온화하다.' 삶은 현실이지만 예술은 허구이다. 대니얼 디포는 이미 소설이라는 형식의 허구가 예술로 인정받기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있었다. 모든 스토리는 모름지기 어느 정도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디포는 서문에서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며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 역시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이던 때가 있었다.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하던 시절이다. 책은 환영을 불러 일으켰다. 워낙 새로워 믿지 못할 매체라고 경계하기도 했다. <로빈슨 크루소>가 나오기 100여년 전 먼저 등장한 <돈키호테>를 보자.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정신이 나간 탓에 풍차에 시비를 거는 주인공."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스토리와 유대감을 키우려는 청중을 공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홀덴의 엄마를 위협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해적 행위에 맞서 싸우는 투사라 여길지 모르지만 물밀듯 밀려드는 창의성의 발현을 도둑질로 매도하며 20세기의 틀에서 허우적대는 미디어를 수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프린스와 같은 예술인은 제로섬 게임의 소품이나 다름없다. 내가 갖지 못하면 남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공유할수록 스토리와 캐릭터들의 가치가 커진다면 어떨까?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비선형 내러티브는 이미 우리 머릿속에 뿌리를 내린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이퍼텍스트로 인해 우리의 의식이 왜곡된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하이퍼텍스트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자연스레 표현하는 의식의 소산인 것일까? 내가 데이비드 린치 감독에게 왜 그토록 비선형 스토리 라인의 영화를 많이 만드느냐고 물었을 때도 결국은 대화가 이 문제로 귀결되었다.
'요즘 우리 삶의 본질이잖아요.' 린치의 답변이었다.
'언젠가 이라크에도 가고 파키스탄이나 뉴욕에 가기도 합니다. 차 안에 있기도 하지요. 그러다 보니 온갖 추억들이 일순 몰려들고 눈앞엔 새들이 날아다니지요. 그 순간 나의 어느 한 부분은 세계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런 생각이 지금 하는 일에 영향을 주는 겁니다.'"

" '우린 그걸 기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기억이나 상상을 통해 그림이 그려집니다. 북아일랜드에서 봤던 아주 사소한 것에서 아이디어가 시작돼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무언가로 곧바로 연결되기도 하지요. 각양각색의 것들이 흘러다니는 겁니다. 그걸 모두 합치면 대단히 정신 사나운 영화가 되겠지요.'
예상 밖의 사건 배열, 느닷없는 중간 생략, 순서가 뒤죽박죽인 장면들. 잠들어 있든 깨어 있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이처럼 빠르게 소멸되는 수증기와 같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그렇기 때문에 하이퍼텍스트는 편리한 비유이자 편리한 희생양인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는 1940년대에 등장한 개념이지만 1960년대나 돼서야 구체화될 수 있었고, 그사이 20년 동안이나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TV를 시청하며 허비했다."

"게임 속의 결과가 좀 더 참혹할 뿐, 주위를 살피지 않고 길을 건너면 낭패를 볼 수 있는 현실 속의 삶과 다를 바 없다."

" '그러니까 골수팬들은 위키를 통해 <로스트>의 가장 불가사의한 부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주워섬기기보다는 그 부분을 잘 모르는 다른 팬들에게 그런 내용을 설명할 의무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

" '실제는 전혀 없는데도 패턴이나 연관성이 있다고 인식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 아포페니아 페이지이다. 근거 없는 이론에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연관성, 의도하지 않은 유사성, 단순한 콘티 오류 등이 집대성되어 있다. 린델로프와 큐즈가 의도하지 않는 수준으로 시청자들이 미스터리 섬에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좋아하지요' 파하리아가 말을 잇는다. 사람들은 다른 것들도 좋아한다. 점수를 따거나 레벨업을 하거나 물건들을 수집한다. 특히 수집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자신들의 소장품에 구멍이 난 걸 참지 못합니다.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겁니다' "

"도요타는 사용자들이 가상 책상에 진열할 수 있는 모형 자동차를 팔기 시작했다. 마스터카드는 모든 '직원'에게 다른 물품을 살 수 있는 슈루트 보상금 200달러 상당의 '상품권'을 증정했다. 파하리아는 실제 돌아가는 상황에 적잖이 놀란 분위기이다. 'NBC는 가짜 돈을 주고 사람들에게 진짜 일을 시키는 꼴입니다' 믿기지 않는다는 투다. '게다가 마스터카드는 가짜 돈을 증정하려고 NBC에 진짜 돈을 치른 꼴이지요' 나중에 어떤 상황으로 이어질지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 '인간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감정적 레이더를 가지고 강박적으로 서로를 살펴본다.' 오클랜드 대학의 브라이언 보이드가 스토리텔링의 진화론적 기반을 연구한 <스토리의 기원>에서 한 말이다."

" '당신이라면 자신의 내집단에 누굴 포함시키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지구 전체가 자신의 내집단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에서 부당한 행동이 자행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례한 행동을 인터넷 탓으로 돌리는 것은 난폭 운전의 책임을 고속도로 탓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DVR이 던져주는 진정한 메시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TV에서 보는 광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툭툭 잘라먹는 광고를 달가워할 리 없다. 고유 판매 제안이든 브랜드 개성이든 크리에이티브 혁명이든 시청자들은 알 바 아니다. 이런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고 나면 6000억 달러 규모의 전 세계 광고 산업은 지금 형태로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도 자명해진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광고를 하면서 제품을 팔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광고 업계뿐 아니라 들려줄 스토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스토리를 들려주려면 관객을 즐겁게 해줘야 할 뿐 아니라 끌어들여 참여시키고 몰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을 위한 신호는 비용이 많이 들기 마련이다. 고집스러운 송신자와 이에 저항하는 수신자 사이에는 군비 경쟁이 고조된다. 메시지는 붉은 사슴 수컷이나 슈퍼볼 광고주들의 울부짖음처럼 갈수록 시끄럽고, 길어지며, 쓸데없이 지속적으로 되풀이된다. 반면 협력 목적으로 사용되는 신호는 '음모의 속삭임'과도 같아서 에너지가 적게 들고 풍부한 정보를 담게 된다."

"요즘 세대는 광고주들이 뭔가 팔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광고주들도 소비자들이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아닌 척하지 말고 최대한 재미있는 광고 경험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위선적인 가면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 '학습과 중독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미시건 대학의 저명한 신경과학자인 켄트 버리지 교수의 말이다. '워낙 밀접해서 거의 포개지다시피 하지요'"

" '동물이 뭔가 찾고 있을 때 도파민을 측정하면 상당량이 검출됩니다. 하지만 찾던 것을 발견하고 소비해버리면 도파민은 더 이상 검출되지 않아요. 목표 달성보다 그 과정에 관여하는 거지요.' 실제 성공을 거두었을 때보다 그 기대감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도 도파민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상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다. 예측 가능한 형태로 주어지면 금세 흥미를 잃고 만다. 무작위로 주어지기도 한다. 또는 완전히 예측 가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작위적이지도 않은 어중간한 형태로 주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세번째 패턴이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 기능을 한다."

"이런 스토리들이라면 무작위적으로 뜻밖의 상황이 속출하기 마련이다. 게임과 닮은 측면이 많은 내러티브라면(결국 만들어놓은 세상으로 사용자를 초대하는 스토리를 가리킨다) 수렵 채집 본능을 자극할 수 있다. 우리는 먹을 것, 점수, 관심, 친구, 잭팟, 해피 엔딩, 온갖 형식으로 스토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수렵 채집 활동에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몰리뉴 말마따나 '더 이상 한쪽에서만 보이는 창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의 눈에 비친 세상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인간이 인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 '더 중요한 질문은 지능이란 무엇인가 여야지요. 인간의 현실은 지능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 '그게 가장 본질적인 거예요. 우리는 기억의 총합인 거지요. 그럼 기억이란 뭘까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왜 그리 소중한 걸까요?' "

"하사비스의 실험은 기억과 상상 간의 연관성을 확인해주었다. ... 하사비스는 기억을 위해 진화한 두뇌 구조가 상상력이 필요할 때도 동원된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합하고 상상하는 능력도 만들어낸 거지요'"

"그럼 대체 진정성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필립 K. 딕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실이란 무엇인가? 내가 누구인지 또는 누구라고 주장하는가도 현실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는 있지만 좀 더 깊숙이 들어가보면 스스로에게 진실된 상태를 뜻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라 해도 꽤나 유동적인 개념이다."

"기술은 한편으로 진정성을 의심케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성을 추구할 무기가 된다. 우리가 정말 진정성을 추구하고 싶다면 말이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단지 원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우리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진정 원하는 것은 바로 홀로데크이다. <트론>의 제프 브리지스처럼 컴퓨터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어 한다. 전혀 진짜가 아닌 무언가에 몰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월트 디즈니가 원했던 그대로이다."

"우리는 그 속에 몰입하길 바라면서도 허구의 것이라면 두려워한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에서 <로스트>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끌 만한 허구치고 몰입도가 낮은 경우는 없었다. 수 세기를 반복하면서 책, 영화, 텔레비전, 가상 세계, 어떤 매체가 되었든 새롭고 더 몰입도가 높은 미디어가 등장하면 우리는 불신을 자발적으로 중단하고 빠져들게 된다. 그럼 가장 최근에 등장한 미디어가 우리에게 우리에게 풀어내고 있는 우주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우리 또한 피할 수 없다. 허구가 현실 세계로 스며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 반대라면 어떨까? 그 모호해진 경계를 다스리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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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440페이지를 읽어내려간 책.

최고로 재미있고, 또 뭔가를 계속 자극한다. 밀도 높은 질문을 계속 던지는 느낌이랄까.

내가 왜 '새로운 도구'에 설레이고 호기심이 느껴졌는지, 이 책을 읽다보니 더 확실히 알 것 같다.

2011/11/21 23:41 2011/11/21 23:41

"콘텐츠가 많아진다는 말은 그만큼 이용하기 힘들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컨대 건초 더비 한 개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다고 가정해보자. 또 똑같은 바늘을 건초 더미 1천 개에서 찾는다고 해보자. ... 그 바늘을 단어나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일관된 문장 하나를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큐레이션은 구원자가 된다."

"그러한 트위터 스트림 속에서 우리가 수집하고 저장하고 논의해야 할 새로운 인간의 패턴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첫 번째 열쇠는 세상에서 논의할 가치가 있는 패턴을 포착해내는 큐레이터가 쥐고 있어요"

"온라인에서 말하기는 점점 쉬워지지만, 듣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콘텐츠 주변에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만들어놓고 입장료를 부과하는 게 가능했던 인터넷 이전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한마디로 터무니없어요. 그러한 시도를 계속한다면 실패하고 말걸요."

"자동화된 콘텐츠 수집과 인간 큐레이션의 차이는 한마디로 신뢰다. 독자는 인간 편집자는 믿지만 알고리즘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독자의 믿음은 관심과 참여, 충성도로 이어진다."

"제가 젊었을 때는 편집자를 존중하지 않았어요. 부차적인 이등급 존재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어요. 중요한 것은 '잡지'가 아니라 '잡지화'예요. 웹에서 이용 가능한 각종 음악과 동영상 링크, 멋진 디자인이 함께 하는 즐거운 독서 체험 말입니다."

"사람들은 웹이 혼란스럽다고 느끼지만 서점은 그렇게 보지 않죠. 필터는 우리가 관심 없는 99퍼센트를 무시할 수 있게 해줍니다."

"문제는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과연 구글 뉴스가 <뉴욕타임즈>를 대체할 수 있을까?"

"저널리즘의 핵심은 언제나 잡음 속에서 신호를 구별해내는 것이었어요. 저는 어디든 달려가서 온갖 지루한 이야기를 들고, 사람들이 2~5분 동안 들어볼 가치가 있는 내용을 뽑아냅니다. 이것은 판단의 문제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대신 인간의 뇌는 패턴을 인식할 수 있죠."

"콘텐츠를 전략적으로 고민하면 할수록 얼마나 작업이 복잡해지는지 깨닫게 돼요. 정말 효과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낼 생각이라면 자원의 재배치와 거버넌스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정의를 내려야 해요."

"<허핑턴 포스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팔러 다니는 전문가 사회가 도래했음을 입증합니다."

"이제 부족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관심입니다. 큐레이트할 정보를 제공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소셜 미디어는 상당 부분 데이터 증가의 주범인 동시에, 우연적이면서 목적 지향적으로 큐레이션을 지원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점점 많은 데이터를 만들고 더 많은 것을 추천하고 있다. ... 그런 면에서 보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트위터와 동일시된다. 나이키 제품을 입는 등 패션에서 표현되던 정체성이 이제는 디지털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미국의 데이터 마이닝 기업인 라플리프는 어떤 개인이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맺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의 신용 위험도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친구가 카드 대금을 제때에 지급한다면 그도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젊어서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를 발판으로 발전해갈 기회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평생에 걸쳐 다양한 삶을 시도해가는 과정을 전부 잡아내는 기술과 함께 살아가야 해요. 이렇게 더 이상 새로운 삶을 시도하기 힘들어지는 사회적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5년 후의 웹은 분명히 모바일, 위치 정보 및 사용자 인식 기반일 것이고, 소액 결제가 주도해나갈 것이다."

"도서관은 큐레이트된 컬렉션이다. 보통은 책마다 듀이 십진분류법에 따른 번호와 정해진 자리가 있다. 그러나 이제 온라인이라는 도서관 문은 활짝 개방되었다. 그 서가에는 문학, 영화, 만화, 요리법, 택시비 영수증, 연애편지 상자, 껌 포장지, 노래 가사 등 잡다한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온라인에 자료를 올리고, 그 카테고리를 분류하거나 태그를 붙이는 방식에는 아무런 기준이 없다. 데이터는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이것도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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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화'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
세상의 많은 컨텐츠들이 잡지의 전달 방식과 화법을 사용한다.
(아..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오늘 잠시 열받게 만든 따라쟁이 온스타일 카카오톡이 갑자기 생각난다. 버럭 한 마디. "그 작은 아이디어까지 따라하는 거, 안 창피하니? 쫌!")

잡지쟁이가 해오던 일련의 작업들, [트렌드, 사람들 관찰 - 니즈 파악 - 기획 - 구성 - 적임자 스탭, 취재원 찾기 - 커뮤니케이션 - 예산에 맞춰 진행 - 글 쓰기 - 더 매력적이게 편집 - 카피 뽑기], 요 작업이 필요한 게 비단 출판업계만이 아니란 사실을 요즘 많이 느낀다.

에디팅을 잘 할 줄 알면 어디가도 굶어죽진 않겠다는, 나 좋을대로 해석하는 편향적인 전망과
세상 컨텐츠가 잡지화가 되고 있다며 자뻑&확대 해석하는 기지를 발휘하며...끝! ㅎㅎ




2011/10/25 00:05 2011/10/25 00:05

MS-DOS 시절의 <테트리스><인디아나 존스>, 그리고 iOS4 시대의 <앵그리버드>.

요 게임들 말고는 그동안 내 혈관 속에 흘러다니는 '집요함의 인자'를 자극하는 게임이 없었다.

다마고치니 심시티니 프린세스메이커니 스타크래프트니 리니지니 하는 수많은 게임이 있었지만 크게 관심도 없었고 해보고 싶단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난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다.


지난 주말에 부서 공용 아이패드에 후배가 깔아놓은 뿌까 레스토랑을 켜보고 나서 주말동안 틈틈이 어떨 때는 3-4시간동안 완벽집중해서 전병을 굽고, 스프링롤을 만들고, 테이블과 의자를 구입하고 서빙하는 다다까지 고용해서 레스토랑을 넓혔다.

일요일 밤 조리시간 12시간짜리 포춘쿠키를 솥단지 위에 올려놓고
월요일 오전, 이제나저제나 완성될까 하고 있었는데
무슨 몰래카메라처럼, 애초 어플을 깔았던 후배가 홀랑 지워버리는 허망한 일을 경험했다.

'아, 너무 집착할 것 같았는데 이참에 손 털자' 하고 잠시 잊고 지냈는데, 조금 전 내 아이폰에 어플을 다운받아 다시 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새 부서에서 풀어내야 할 숙제의 무지막지한 규모와 막막함의 무게에 괴로워하다가 '아, 몰라몰라. 다 잊을래' 하고 뿌까를 켠 것이다.

근데 왜 하필 이 게임이 하고 싶었던 걸까? 이 게임의 어떤 면이 재미있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걸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잠시 생각해보다 곧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성실함으로 인정받기.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하는 목적이다.
대단한 스킬이나 조정능력보다 그저 시간과 꾸준함만 있으면 레벨을 올릴 수 있다.
물론 레스토랑을 꾸미고 직원을 고용하는 등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게 해놓긴 했지만 일순간 돈으로 모든 것을 사서 한큐에 끝내버리면 이 게임을 하는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10초에 한번, 길게는 12시간에 한번씩 요리가 잘 되어가는지 들여다보고 뿌까 머리위에 뜨는 전구를 탭해서 포인트도 쌓고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살림살이를 하나씩 늘리는 것,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전세계에서 알아주는 5성급 레스토랑의 셰프가 되리라 꿈꾸게 하는 것이 이 게임의 묘미다.
더없이 서민적이고 근면성실한 판타지랄까.

모름지기 게임이라 하면 마법의 검을 들고 불 뿜는 드래곤과 싸우거나 전투함대를 구축해 화려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맛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면 뭘 지으려면 도시 하나 정도는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무언가를 꿈꾸게 하고 해소시켜주는 게 게임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라면 말이다.

뿌까 레스토랑의 세계 안에선 내 가게 옆에 무지막지하게 들어서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도 없고, 목이 좋은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손님은 끝없이 들어오고, 영업만 계속하면 물가와 상관없이 음식 재료는 딸리지 않게 공급이 되고, 안하무인 고객'님'도 없으며 대출금도 권리금도 없다.

꿈꾸게 하고 무언가가 해소되는 판타지, 맞다.

이건 역으로 보면 전략전술 없이 근면성실하게 일하고 한푼두푼 모아서 내 영역을 넓히고 존경받는 위치까리 올라가는 일, 이것이 불 뿜는 드래곤과 싸우는 것만큼 황당무계하고 실현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시대라서, 이 게임이 지금 우리들 마음을 잡아끌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니, 급 서글프다.
아, 가벼워지려고 뿌까를 켰는데, 뿌까가 나에게 빅엿을 줬어.
ㅠㅠ

2011/10/13 00:23 2011/10/13 00:23

김어준 <닥치고 정치>

from Library 2011/10/03 14:30
"이런 태도 뒤의, 자신이 가진 걸 당연히 여기는 종류의, 진보적 엘리트 특유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공기처럼 흐르는, 우아하고 거룩한 오만. 그런데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그런 작은 문장을 통해 그런 분위기를 아주 섬세하게 느껴."

"진정성이야 조국도 넘치지. 진심이 느껴지는 태도나 먹혀드는 말발의 차원이 아니라, '어, 이 사람 유불리를 안 따지네. 앗쌀한데'. 그렇게 정치인이 자신의 타고난 생김새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어요. 결정적인 순간이. 그런 결정적 순간들은 말로는 뭐라 표현 못해도 사람들이 알아봐. 알아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꽂히는 거지."

"대중의 감각으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능력. 그거 정치인으로선 가장 중요한 자기 객관화야. ... 방송에서도 대중이 어떻게 보느냐보다 내가 방송에서 날 봤을 때 내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가 먼저 신경 쓰였던 거지. 그게 정치인으로서의 강금실이 가진 한계였고."

"그 태도를 결정하게 만드는 건 결국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해. 하나는 욕망이고, 나머지 하나는 공포야. 그게 모든 동물의 생존 방식을 결정하는 두 축이라고 봐. ... 그 공포에 대처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바로 좌, 우다. 난 그렇게 생각해. ... 자기가 강해서 획득한 자산. 그걸 남에게 뺏기지 않을 권리, 그렇게 확보한 자산의 차이로 만들어지는 위계, 그렇게 형성된 계급의 유지, 그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질서, 그 질서의 지속적 보장,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에선 그런 것들이 무척 중요해지는 거지."

"정보는 그 자체로는 데이터에 불과하고 결국 어떻게 프로세스 하느냐가 중요한데, 그 처리 과정을 지배하는 게 바로 자신의 생겨먹은 기질이란 걸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거지."

"우가 그 공포에 압도되어 자기만이라도 살려고 반응 하는 거라면, 좌는 그 공포를 잘게 나눠 각자가 담당해야 하는 공포의 몫을 줄여서 해결하려 하는 거라고. ... 그런데 그렇게 좌가 논리적 추론을 하려면 먼저 우처럼 정서적 공포에 압도되지 않아야 하거든."

"한마디로 밥줄공안의 시대가 개막된 거지."

"그런데 문재인 같은 사람들은 그 순서가 달라. 거꾸로라고. 왜냐면 문재인 같은 사람들은 자신을 도구화할 줄 알거든. 유시민, 노무현, 이런 사람들은 어떤 상황 앞에서는 그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도구화한다고."

"인간적 욕망과 자괴를 이해해야 문제의 본질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포장에 속으면 안돼."

"삼성은 돈의 종교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경제적 메시아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는 데 성공한 거지. 그 과정에서 삼성은 곧 이건희라는 상징화 역시 성공시킨 거고."

"도덕적 조직적 강박이 진보 정당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야."

"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정신노동을 요구하는 건, 실은 스스로를 그만큼 똑똑하고 정당하다고 여겨서야. 그 정도는, 나처럼, 당연히, 구분할 수 있고, 또 구분해야만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있는 거거든. 그래서 내가 헛똑똑이들이라고 하는 거야. 자기들이 똑똑하고 정당한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정치에서 중요한 건 사람들 마음을 얻는 건데, 마음은 대단히 제한된 자원이라고.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여러 번 나눠줄 만큼 많지가 않아."

"이념은 서구의 것이되, 그걸 수행하고 주장하는 방식은 여전히 성리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거지."

"그런 소리는 그냥 옳기만 한 소리라고. 옳기만 하면 뭐해. 거기에 맥락과 인간과 타이밍이 없잖아. 그런 메시지엔 아무런 힘도 없다고."

"신자유주의가 나쁘다는 건 나 역시 천만 번 동의하는데, 상대가 알아먹어야 메시지인 거지, 상대는 못 알아 먹는데 어떻게 메시지냐고. 혼잣말이지. 정치를 혼잣말로 하면 어떡해."

"자신들의 눈물겨운 노고가 상대에게 죄의식을 요구할 권리가 될 순 없다는 걸 좀 깨우치셨으면 해. 종교가 아니라 정치 좀 해줬으면 한다고. 포교 말고 연애 좀 하자고, 제발."

"정치는 상대가 날 인정해주는 게 아냐. 내가 내 존재를 스스로 입증하는 거지."

"하지만 노무현을 만나본 적도 없는 수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그리고 슬퍼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라고. 평생을 자연인으로 산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느껴졌던 거라고. 그게 연출 없이 살아내는 자의 힘이라고."

"사람들은 여의도가 얼마나 치열하고 비정한 욕망의 전장인지 잘 몰라. 그걸 모르면 그들 행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걸 알아야 좋은 정치인이 얼마나 드물며 그런 정치인을 드물게 발견했을 때 그들을 얼마나 아껴줘야 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 말이 하고 싶었어."

"연애와 결혼은 단편적인 예일 뿐이고. 우리가 겪는 무수한 일상과 삶의 갈등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자기 바닥을 확인하는 과정, 그건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인지 받아들이고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가 되어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절차지. 그리고 그런 과정을 겪고 나서야 자신만의 균형 감각을 획득하는 거다. ... 그래서 구체적 삶이란 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어떤 구체적 삶을 살아왔는가가 결국 그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인간을 이해하려면 단일 학문으로는 안 된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팩트와 가치와 논리와 감성과 무의식과 맥락과 그가 속한 상황과 그 상황을 지배하는 프레임과 그로 인한 이해득실과 그 이해득실에 따른 공포와 욕망, 그 모두를 동시에 같은 크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섭해야 한다. 나는 통섭한다.(웃음) 오늘 끝."

"현재 대중의 거대한 결핍이 뭔지를 봐야지. 그것부터 받아안아야지. 당장의 요구도 받아안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20년 뒤를 이야기해."

"이념과 명분과 논리와 이익과 작전과 조직으로 무장한 정치인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보편준칙을, 담담하게, 자기 없이, 평생 지켜온 사람이 필요하다. 시대정신의 육화가 필요하다. 문재인이란 플랫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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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광화문 교보에 들렀다.

입구 앞에서 유세 중인 나경원 후보 무리와 지나쳤다. 사람들은 멀찌감치서 그 무리를 관망하고 있었고, 그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악수를 하며 다가가거나 먼저 말을 거는 건 나경원이었다.

책을 구경하고 있는데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한아름 안아든 알바생이 다른 알바생에게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야, 대박. 벌써 다 나갔어."

바로 뒤이어 <닥치고 정치>를 품에 안은 커플이 지나가며 또 한마디. "오빠. 아까 여기 쌓여있던 책 다 없어졌어."

이들의 낄낄거림이 섞인 수다에서 통쾌함 같은 게 살짝 느껴졌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큭큭.

집에 와서 단숨에 완독. <칼의 노래>처럼 숨이 찰 정도로 흡입하는 힘이 있어서 중간에 덮을 수 없었다. 이건, 벼락같은 축복?

오늘, 집앞 MMMG 카페에 왔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한 커플이 아이패드로 <나는 꼼수다>를 경청 중이다.


김어준과 그의 컨텐츠를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이유가 뭘까, 그 생각을 하며 책을 발췌 정리하다보니 그의 책엔 '정치 교본' 그 이상이 담겨있다고 느껴졌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그걸 말로 정리하면 단순자명한 상식처럼 들리지만 그걸 실천하면서 구체적으로 살아낸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가 내뱉은 말 하나하나가 새롭게 느껴지고 생각을 환기시켜주고 영감을 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앞으로 파괴력 있는 컨텐츠는 '논리+작전+조직'보다 '맥락+인간+타이밍'의 총합으로 탄생될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이 분이.

이 조언이 꼭 정치판에만 필요한 건 아니니까.

게다가 정치가 내 삶하고 분리된 것도 아니니까.

이 책에서 '훌륭한 컨텐츠 기획자가 되는 법'의 힌트까지 얻어버렸네, 나는. ㅎㅎ


2011/10/03 14:30 2011/10/03 14:30
  1. thedream 2011/10/04 12:3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나도 읽어봐야 겠구만.
    요즘 꼼수 폭풍 청취 중. 씨바 김어준 멋지다.